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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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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노인종합복지관] 인터블루 방송국 "박희경 어르신" 조선일보 인터뷰

http://news.nate.com/view/20111020n00179

[앙코르 내 인생] 전업주부로 두 아들 키운 뒤 58세에 아나운서 된 박희경(63)씨
조선일보 원문 기사전송 2011-10-19 23:38 최종수정 2011-10-20 08:13


노인 라디오 프로그램 간판 MC… "목소리 좋다고 소문나 TV에도 나갔어요"
선곡부터 대본까지 65세 이상이 맡는 아침프로
트로트·팝송 틀어주며 동네주민과 일상 얘기
녹음 후 친구들과 운동한 뒤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 행복해

서울 관악·양천·구로·동작구에 사는 분들은 한 번쯤 새벽 6시 '관악FM'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주세요. 할아버지·할머니 10명이 돌아가며 진행하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 '쾌지나청춘' 코너가 시작됩니다. 흥겨운 트로트도 틀고 달콤한 팝송도 틀어요. 노래 나오는 간간이 세상 사는 얘기도 나누고요. 동네 사람들 듣는 방송인 만큼 부담 없는 일상 얘기를 주로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죠.

"배추값이 올라서 걱정하시는 분이 많던데, 방송 녹음하러 오다 보니 어느 마트에서 싸게 팔길래 저도 몇 포기 사서 가게에 맡겨뒀어요. 방송 마치고 퇴근할 때 찾아다 김치 담그려고요. 찬바람 날 때 딱 좋은 노래,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보내드립니다."


저는 관악노인종합복지관 산하 '인터블루 방송국'의 5년차 아나운서입니다. 기계 만지는 일부터 선곡하고 대본 쓰는 일까지 65세 이상 인력이 도맡아 해요. 처음엔 관내 방송만 했는데, 차츰 방송 실력이 늘어 지역 방송국인 관악FM과 협약을 맺고 하루 1시간씩 '쾌지나청춘'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재미있냐고요? 그럼요. 저는 매주 1회 방송을 진행하는데, 목소리가 젊고 낭랑하다고 소문나 KBS 교양 프로그램 '생로병사의 비밀'에도 출연했답니다. 무보수 봉사 활동이라 자부심도 느껴요.

전북 익산에서 공무원 집안 1남 4녀 중 넷째 딸로 평탄하게 자랐어요. 남편(68)은 자상한 남자입니다. 한평생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열심히 회사 다닌 고마운 가장이지요. 요즘은 은퇴해서 요가도 배우고 바둑도 두고 제가 하는 방송도 모니터해줍니다. 와이프가 환갑 넘어 아나운서 일을 할 줄은 몰랐다네요.

사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여고 때도 방송반은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복지관 친구의 권유로 얼떨결에 방송 교육을 받았어요. 처음엔 "이왕 시작했으니 내 몫을 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하면 할수록 방송이 적성에 맞아 일 자체를 즐기게 됐어요.



전업주부로 살아온 제겐 신선한 경험이에요. 결혼 전에 잠깐 직장 생활을 했지만, 제 또래는 시집가면 으레 살림하는 줄 알았지요. 살림하느라 바빠 못 가본 길을 아쉬워할 짬도 없었어요. 우리 땐 다들 천 기저귀 빨고 연탄불 갈며 분주하게 아이들을 키웠거든요. 그리고 저는 똑 소리 나게 살림하는 알뜰 주부였어요. 설거지를 하면 그릇이 반짝반짝 빛나고, 반찬을 하면 남편과 두 아들이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했어요.

살림 재미에 푹 빠져 지내면서도, 마음 한쪽엔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지요. 큰아들(38)이 고2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다기에, 저도 1년간 매주 이틀씩 서울 화동 정독도서관에 나가서 일본어 무료 강좌를 들었어요. 남편이 은퇴한 뒤에는 함께 복지관에 다니며 종이접기·하모니카·구연동화 등을 배웠고요. 내가 이걸 배워서 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소소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고 자잘한 일상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었어요.

저는 젊은 시절 남편이 퇴근 전에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야?"라고 물어주는 게 참 좋았어요. 요리하면서도 신이 났지요. 저 자신은 150원짜리 고무신을 몇 년씩 신었지만, 남편 옷은 동대문시장에서 고급 양복감을 끊어다가 광교·무교동 양복점에서 맞추곤 했죠. 힘겹게 중년을 지나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저는 이렇게 속삭여주고 싶었어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거야."

요즘 저는 아침 일찍 남편 밥 차려주고 복지관에 와요. 교양 강좌 듣고 방송 녹음하고 가까운 탁구장에서 친구들과 흠뻑 땀을 흘리죠. 집까지 50분쯤 걸어가면서 그날 하루 있었던 즐거운 일을 되새기고 언짢은 일을 훌훌 털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고향땅' 이라는 동요를 흥얼거리는 저 자신을 발견해요.

제 마음 어딘가에 아련한 향수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친정아버지는 그림도 그리고 바이올린도 켜는 멋쟁이셨어요. 당뇨로 고생하다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아직 시집 못 보낸 넷째 딸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병상에서 자주 편지를 보내셨어요. "사랑하는 꼬마야, 날이 추우니까 단단하게 입고 다녀라."

거창할 것 하나 없는 아버지의 소소한 당부가 지금껏 저를 울려요. 저는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에디 피셔의 팝송 '오 마이 파파(Oh, My Papa)'를 틀어요. 작은 방송국이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듣고 있겠죠. 그분들이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정리=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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